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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만난 미얀마인 "죽음 두렵지만···"

입력 2021.04.08. 14:34 수정 2021.04.08. 23:57
김승용 기자구독
조영석이 만난 사람③
'미얀마 민주화의 전위'로 피어난 마웅과 샤
미얀마 유학생 마웅과 사샤씨가 민주화 시위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광주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오세옥기자 dkoso@srb.co.kr

미얀마 양곤에 살던 13살 소년 와이옌은 마을 골목길에서 놀다 군경의 총에 맞아 숨졌다. 군경은 아이의 주검을 비닐 봉투에 담아 트럭에 싣고 갔다. 와이옌의 엄마는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 가느냐. 너 없이 어떻게 살라고…"라고 울부짖었다.

80년 5월 당시 광주의 13살 소년 방광범은 마을 앞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다 공수부대의 조준사격에 두개골이 관통, 숨졌다. 공수부대는 시 외곽으로 이동하던 중에 꿩 사냥 하듯 그렇게 소년을 쏘았다.

미얀마에서는 지난 2월1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군경의 잔인한 만행으로 지금까지 560여명 가량의 시민들이 학살됐다. 더해지는 날은 끝이 보이지 않은데 사망자 수만 가파르게 더해지고 있다.

광주시민들에게 미얀마 민주화 시위는 남다르다. 41년 전 '5월 광주'를 미얀마에서 다시 보고 있다. 소환된 기억은 되살아 박동치고, 이국의 비장한 시위는 동병상련이다. 시위 현장에 부재함을 '현 위치가 최전선'이라는 믿음으로 대신하며 항쟁의 전위를 자임하고 있는 미얀마 유학생 마웅(MAUNG·26)과 샤(SHAR·21)를 만났다.

마웅 씨는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학과 1학년, 샤 씨는 고구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학년에 각각 재학 중이다.

- 미얀마의 군부가 비무장 시위대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무차별 학살하면서 내전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심경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면 내가 총 맞은 것처럼 아프고 눈물이 난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민주화 시위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고국의 사람들은 밥 먹다 뛰쳐나가고, 잠을 자다 도망가는데 우리는 외국에 나와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또 그들이 불쌍해서 밥도 잘 안 먹어진다. 광주에 살고 있는 328명의 모든 미얀마 사람들은 고국의 시위에 동참하는 의미로 하루 한 끼만 먹고 있다. 고향에 가서 우리도 직접 시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죽음은 두렵지만 죽음이 무서워 참여하지 않는다면 지금 시위에 나서고 있는 우리 친구들도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총이 있다면 총을 들고 싸우고 싶다."

- 고국의 민주화 시위와 관련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

"페이스북 등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고국의 지인들과 정보를 교환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어느 지역에서 시위가 열리고 있으니 가달라'거나 '총 맞은 부상자가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체포되면 어디로 연락하라' 는 등이 현지에서 필요한 정보다. 낮에는 학교 수업 때문에 주로 밤에 한다. 신속한 정보 공유가 시위에 도움이 될까싶어 어떤 날은 꼬박 새기도 한다. 지금은 인터넷이 차단돼 이마저도 쉽지 않다. 또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 광주시민들의 미얀마 민주화지지 시위에도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 모금활동이나 언론 인터뷰도 많이 한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 1일 무선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 중단을 지시했다. 군부는 인터넷 차단과 복구를 간헐적으로 반복해오다 지난달 15일부터 심야시간 모바일 인터넷도 차단했다.

- 세상을 살다보면 이를 악물고 걸어가야 할 길도 만난다. 어떤 각오로 활동하고 있나.

"미얀마 군부는 끊임없는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고 국민을 탄압해 왔다. 나라는 갈수록 피폐해지고 인권은 실종된 지 오래다. 군부는 국군의 날에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돌리고 학살했다. 이제 이러한 군부독재를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이 없다. 이번 민주화 시위에서 우리가 지면 북한처럼 될 것이고, 이기게 되면 한국처럼 우리도 살 수 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나라의 내일을 위해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비록 고국의 민주화 시위 현장에 있지는 못하지만 이곳이 최전선이라는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 고국의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가족들도 당신들의 활동을 알고 있는가.

"미얀마 수도인 네피도에 가족들이 살고 있다. 나는 2남6녀의 막내인데 고교 선생님인 셋째 언니와 간호사인 다섯째 언니는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 하고 있다. 또 둘째 오빠가 경찰이다. 엄마가 '군부 편에 서지 말고 시민들 편에 서라'고 당부했으나 현재는 가족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총무성 고위 공무원이셨던 아빠는 8888시위에도 참여했었다. 아빠는 '한국에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하시면서도 '그 곳에서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주신다. 샤는 만달레이가 고향이다. 공항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하신 아빠와 2년 전 광주에 왔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빠도 이곳 광주에서 미얀마 민주화지지 시위에 참가하고 있고, 고향의 여동생은 시위대의 선두에서 싸우고 있다. 샤의 활동을 군부가 알고 있어서 걱정이다. 샤의 어머니는 군부로부터 '딸(샤)의 행위를 당장 그만 두게 하라'는 협박을 받고 현재 숨어 지낸다."

- 마웅은 버마족이고 샤는 카렌족이라고 했다. 두 민족은 오래전부터 적대관계를 이어오고 있지 않는가.

"사실이다. 카렌족들이 미얀마를 통치하고 싶어서 정부와 싸우고 있다고 믿었었다. 아주 위험한 민족이고 나쁘다고 생각해왔다. 이제는 오해가 풀렸다. 모두 군부의 거짓 선전 술책이었다. 이번 일로 왜곡과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게 됐다. 샤도 군부 쿠데타 이전에는 우리 버마족을 엄청 미워하고 싫어했다. 군인들의 대부분이 버마족이고, 그들이 카렌족을 탄압해 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불교도이고, 샤는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하나다. 군부와 싸우는 미얀마 국민만 있을 뿐이다. 샤와는 광주에서 열리는 미얀마 민주화지지 시위 때 처음 알게 됐다. 지금은 매일같이 서로 만나 함께 밥 먹고, 같이 자기도 한다. 막내인 탓에 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이번에 동생이 생겼다. 샤도 언니가 없었는데 언니가 생겨 너무 좋다고 한다."

고국의 시위 동참 의미로 하루 한끼만

총이 있다면 총 들고 싸우고 싶을 뿐

미얀마 군부로 나라 피폐해진지 오래

민주화 시위에서 진다면 北처럼 될 것

이곳이 '최전선'이라 생각하고 활동

한국활동으로 가족까지 위협받는 상황

'나'보다 타인을 위한 삶 살고 싶어

영화 통해 '80년 5월 광주' 알게 돼

우리도 광주처럼 반드시 승리 하고파

광주 도움의 손길 미얀마에 힘·용기

더 많은 국가들의 관심과 지원 절실

전남대학교 후문 인근 젊음의 거리에서 미얀마 유학생 마웅(MAUNG)과 샤(SHAR)씨가 조영석 무등일보 시민기자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세옥기자 dkoso@srb.co.kr

카렌족 무장단체인 카렌민족연합(KNU)은 1948년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자치권을 요구하며 반정부 무력 투쟁을 하고 있다. 지난달 30일에도 군부는 카렌 반군이 정부군 초소를 공격한데 따른 보복 조치로 전투기를 2대를 동원해 반군지역을 폭격했다.

-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사건은 개인의 가치관에도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미얀마의 이번 군부 쿠데타로 바뀐 게 있다면.

"나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8남매의 막내로 살다보니 나밖에 몰랐다. 이번 민주화 시위를 보면서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고향에서 한국어 선생님이 되어 한국과 미얀마의 선한 이웃 만들기에 노력하고 싶다. 샤는 기자가 되어 조국의 민주화에 보탬이 되고 싶어 한다."

-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가 41년 전 '5월 광주'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알고 있는가.

"2019년에 광주에 왔는데 그때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지금의 미얀마와 같은 아픔을 광주가 겪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미얀마는 모든 국민이 민주화시위에 나서고 있지만 5·18때 광주는 홀로 싸웠다. 어쩌면 광주가 더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끝내는 이겼다. 우리도 광주처럼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 광주지역 시민단체와 5·18관련단체, 종교계 등이 '광주연대'라는 공동 대응단체를 구성,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각종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미얀마 현지에서도 알고 있는가.

"한국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안다. 특히 광주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일부는 광주가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5·18 항쟁의 도시라는 것도 안다. 큰 힘이 되고 있다. 미얀마 사람들이 '한국인들에게 감사합니다(Thank you Korean)'라며 SNS에 사진을 많이 올린다."

광주연대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5·18항쟁의 상징장소인 아시아문화전당 앞 5·18분수대를 비롯한 광주고속 터미널 앞 등지에서 미얀마 민주화지지 시위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9년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민 꼬 나잉(Nin Ko Naing)은 지난달 26일 5·18 기념재단에 '여러분의 지지가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으로부터 용기와 교훈을 얻어 투쟁에 임하고 있다'는 내용의 감사서한을 보낸 바 있다.

- 국제연합(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미얀마 군부의 시민학살에 대해 적극 개입하기 보다는 규탄 성명발표에 그치고 있다.

"평화유지군 등 무력개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력개입이 쉽지 않다면 군부에 대한 강력한 경제적 봉쇄조치라도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 모른다. 경제봉쇄와 함께 새로운 미얀마를 위한 '미얀마 연방의회 대표 위원회(CRPH)'에 대한 재정 지원도 절실하다. 각계의 기부가 이어지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한 상태다. 관심을 갖고 도와 달라."

지난 1일 미얀마 야당의원과 시민단체가 CRPH를 결성, 임시헌법을 선포하고 국민통합정부 출범을 선언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인터뷰는 마웅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샤는 거들었다. 묻고 싶은 말보다는 해주고 싶은 말이 더 많았다. '오늘의 분노가 당신들의 나라를 어제보다 나은 세상으로 이끌 테고, 영광과 자부심의 시간으로 당신들과 함께 할 것이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고국의 실상을 말할 때 그들의 한국어는 어눌했지만 충분히 비장했고, '떡볶이가 맛있다'며 한국생활을 얘기할 때는 까르르 날았다. 봄날의 그들이 앳되어 슬펐는데, '미얀마'가 '광주'와 오버랩 되면서 그들은 내가 되고 나는 그들이 되었다. 경험의 공유가 감정이입으로 치달았다.

조영석 시민기자 kanjoys@hanmail.net

조영석은

'5월 광주' 당시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때' 전남도청 앞 금남로의 현장에 있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산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근엄한 군상들을 향해 '자식, 웃기네~'라는 한 마디를 던지며 잘난 체도 할 줄 안다. 자신이 누릴 만큼의 자유를 위해 싸워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자부다. 그 마저 없다면 '부끄러워 어찌 살꼬'라는 이름을 갖고 살았을 터다. 하지만 팔 수 없는 광주의 자부를 파는 사람을 '웃기는 자식' 만큼이나 혐오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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