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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것 이웃에 나눔으로써 더 부유해지는 역설이 봉사죠"

입력 2021.04.22. 16:38 수정 2021.04.22. 16:39
김현주 기자구독
조영석이 만난 사람 ④
‘이웃과 함께’, 60년 지켜 온 스무 살 시절의 약속 - 박종수치과 원장
대학생 당시 주변 도움으로
아버지 깊은 병환 무료치료
"한평생 이웃에 봉사" 다짐
'박종수치과의원' 박종수 원장이 지난 20일 광주시 동구 치과병원에서 무등일보 시민기자와의 인터뷰를 갖고 "스무 살 청년의 시절 '평생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약속을 팔순이 넘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srb.co.kr

'박종수치과의원' 박종수 원장(81)은 서울대 치과대학 재학시절 아버님의 병환을 계기로 '평생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다. 스무 살 청년의 그 약속은 팔순을 넘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 듯, '약속'은 일상이 되었다.

대학 재학시절의 무의촌 의료봉사활동은 현실화된 약속의 시발점이 되었고, 월남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하면서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전장에서 내민 그의 손길은 부상병은 물론 현지 주민들까지 가리지 않았다. 베트남 정부는 그의 헌신적 활동에 '1등명예훈장'으로 화답했다.

치과의원을 개원한 이후에도 매주 일요일마다 무의촌 의료봉사활동을 이어갔고,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가족, 외국인 근로자 등을 대상으로 한 무료진료로 약속의 깊이를 더해갔다. 보철치료와 틀니제공 등 무료 치료의 손길이 3만 여명에 이른다. 2020년 'LG 의인상'을 수상했다.

그의 이웃사랑은 '사랑의 식당'에 닿아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개미꽃동산' 창립멤버가 돼 허상회 원장과 함께 1991년 광주공원에 '사랑의 식당'을 열었다. 초대 이사장을 지낸 허 원장이 작고 한 뒤 2018년부터 '사랑의 식당' 이사장을 맡아 지금까지 노숙인과 독거노인들에게 끼니를 제공하는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약속의 창문을 연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 온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상쾌하다.

'박종수치과의원' 박종수 원장이 지난 20일 광주시 동구 치과병원에서 무등일보 시민기자와의 인터뷰를 갖고 "스무 살 청년의 시절 '평생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약속을 팔순이 넘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srb.co.kr

- '사랑의 식당' 은 어떤 곳인가.

"단순화하자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끼니를 제공하는 곳이다. 하지만 끼니 제공은 단순히 육신의 굶주림을 해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산다'고 하듯이 '먹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자 인간다움의 첫째가는 조건이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존중 받을 권리가 있고, 거리의 걸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생존의 기본인 끼니 제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곳이 '사랑의 식당'이라고 할 수 있다.

무료급식이지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는 밥값으로 100원을 받는다.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존중하기 위해서다.

'작은 성인'이라고 불렸던 고 허상회 원장께서 광주공원의 노숙인들을 데려다 식사 대접을 하다 보니 규모가 커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사회복지법인 공익재단이다. 독지가와 시민들의 십시일반 후원이 큰 힘이 되고 있다."

- 하루 이용자가 얼마나 되는가.

"광주공원의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점심식사를 제공하고 있는데 사랑의 식당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하루 600명에서 많게는 800명까지 찾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인근의 첨단이나 하남지구는 물론 화순이나 담양 등지에서도 발길이 이어졌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600명분의 6일치 도시락을 만들어서 월요일마다 나눠준다. 절반 정도는 직접 받으러 오고, 나머지 절반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방문하여 전달하고 있다.

추석과 설 등 명절에는 약간의 제물과 현금 2만원을 담은 성금 봉투도 드린다. 작은 보탬이지만 그들이 자존감의 불쏘시개로 여기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힘들거나 귀찮을 때도 있을 것 같은데.

"봉사라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어서 하면 할수록 빠져들게 된다. 봉사활동을 오래 하다보면 봉사는 남을 돕는 일에 앞서 나를 성장시키고 깨우치게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 기쁨으로 환치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특히 개인적으로도 이웃의 크고 작은 도움과 종교인으로서의 축복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가능했다. 그러니 받은 것만큼 베푸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지난겨울, 생명부지의 사람에게 신장을 기증한 자원봉사자 한 분이 우리 식당에 계신다. 60대인 그분은 '좀 더 일찍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면서도 '이제라도 한 생명에 도움을 준 것이 너무 기쁘다'고 하신다. 자신의 신체를 이웃을 위해 내어주면서도 기뻐하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다'는 이유로 '내 코가 석자'라는 사람도 많다. 봉사는 누가 하는가.

"봉사는 잉여의 내줌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더 부유해지는 역설이 봉사다. 재벌에 서울대 출신만 봉사하는 것 아니지 않는가. 사랑의 식당을 만든 허상회 원장은 초등학교도 못나왔지만 50년 동안 1,000여명의 구두닦이 소년들을 자수성가 시켰다. 이제는 자수성가한 구두닦이 소년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사회 곳곳에서 봉사활동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 무의촌 봉사활동과 관련,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대학 본과 4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대학 졸업 후 군의관 시절은 물론 치과의원을 개원하고서도 매주 무의촌 봉사활동을 다녔다. 1988년 공중보건의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20여 년이 넘도록 해왔으니 무의촌 진료는 일상과 다름없었다. 무의촌 진료를 떠나기 전 이것저것 도구들을 챙길 때는 여행 전날처럼 마음이 설레고 신명났다.

전라남도 도서벽지나 산간오지에 내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다. 어느 섬마을 초등학생들이 고사리 손으로 직접 쓴 100여 통의 감사 카드를 받았을 때의 감동이나, '치과의사를 평생 처음 보았다'며 손을 잡아 흔들며 뛸 듯이 좋아하시던 시골 할머니의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평생의 반려자도 만나는 보상도 받았다. 광주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간호대 조교로 무의촌 봉사활동을 나온 지금의 아내 박오장(75·전남대 간호대 전 학장)씨를 만났는데 얼마나 맑고 활달하던지...(웃음)."

박 원장은 무의촌 봉사활동 이후에는 방향을 돌려 광주시내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외국인 근로자 등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대상으로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보철치료 등의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 평생을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오고 있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중학생 때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이 병환으로 쓰러지면서 빈곤의 극한을 경험했다. 월사금(납부금)이 밀려 교장선생님이 서 계신 단상으로 불려나와 여러 급우들이 보는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 정학까지 당할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공부만은 한 순간도 놓아 본적이 없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다행히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어 겨우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의 병환이 악화되어 다시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국립중앙의료원에 무료수술을 지원했지만 '대학생까지 있는데 무슨 극빈자냐'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매일 아침 병원 정문에 서서 출근하는 담당 의사를 향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학교수업을 마치면 다시 병원으로 달려가 퇴근하는 담당의사에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8개월을 보냈지만 세상은 냉혹했다. '없는 자는 죽어야 하는가.'라는 비탄에 빠져 남산에 올라 생의 끝을 생각하기도 했다.

모교 교수님과 동문들의 진정과 담당 주치의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아버님의 무료 입원이 병원 측으로부터 결정되던 날 '평생을 불쌍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다.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많지만 지금껏 그때의 약속을 실천하며 살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 희망이 있다면.

"'사랑의 식당 건물을 증축해서 1층은 무료급식소로 사용하고, 2층은 불우 노인을 위한 무료치과와 노인무료건강증진센터로 만들자'고 했던 허 원장과의 생전 약속을 지키고 싶다. 그 곳에 현재의 치과의원을 정리, 기증하고 노인들을 돌보며 생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크게는 사랑의 식당이 충청북도 음성의 꽃동네처럼 호남의 꽃동네가 되는 것을 보고 싶다.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일제치하에서는 3.1운동이 애국이었다면 지금은 마음속 긍휼의 실천이 애국이 아닐까 한다."

- 세상은 '없는 자는 죽어야 하는가'라며 비탄에 빠졌던 그 때와 다름없이 냉혹하고,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픔은 희망과 소생과 미래를 기약하는 어음 같은 거다. 치통이 있기 때문에 치료를 받아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파 죽겠네'가 아니라 '아파서 살겠네'가 적확한 말이다.

지난날의 절망과 분노의 생활은 내 나이의 세대가 겪는 시대적 과정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의 분노는 늘 더 큰 사랑으로 그 모양이 달라지곤 했지 않나 싶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긍지를 가지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종수 원장은 팔순의 나이를 넘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치과의원 원장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장장 3시간 넘게 진행됐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그의 팔순 평생을 봉사활동가로 한정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다름 아니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청소년 선도 영화의 주인공이었고, 5.18 항쟁 때는 순교를 자처한 투사였다. 대한치과의사협회의 '치과의사윤리헌장'을 제정한 지식인이자 전남도청이전 반대 시민운동가였다는 이야기도 지면에 싣지 못했다. 다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을 상호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의 실천이 그의 팔순 평생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조영석 시민기자 kanjoys@hanmail.net

조영석은

나이 들어가며 나잇값 하는 일이 참 어렵다. 나잇값은 수 십 년째 인상되지 않고 있는데 나이만 늘어간 탓이다. '나 때'를 좋아하면서도 '꼰대'는 싫어하고, 자신의 잘 난체 함에는 둔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 난체 하는 꼴은 금방 알아차린다.

버려지지 않는 자존심은 면도날처럼 여전히 예리하여 자신을 베고, '몸에서 빠진 기운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성질로 이동 했다. 그럼에도 물려받은 유전자 탓에 선한 척 하지 않아도 선하게 보이는 강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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