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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시각장애인 CEO' 김갑주 대표

입력 2021.06.17. 09:56 수정 2021.06.17. 13:26
이석희 기자구독
어둠을 사르고 도전과 끈기로 세상을 밝히는 팔색조
조영석이 만난 사람⑧두메푸드시스템(주) 김갑주 대표

방송국 라디오 칼럼니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산악회를 만들어 지리산과 한라산은

물론 일본 후지산까지 오른

준산악인이자 행정자치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이기도 하다

애주가에 색소폰 연주자라는

직함도 명함에 쓸 정도는 되고,

작사자에 테너 합창단원도

볼 수 없음을 손으로, 또는 귀로

대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

행복은 다름을 비교하면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도 없이 세상 속으로 굴러

들어가니 행복이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나를 둘러 먹은 사람보다는

나를 도와준 사람이 더 많고,

비록 사기를 많이 당했지만

사기 친 사람보다 내가 더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김갑주(61) 대표이사는 대학 3학년 시절 망막색소변성증으로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스물세 살 청년의 두 눈앞에 있던 세상이 어느 날 종적을 감춰버렸다. 청년의 앞날도 함께 사라졌다. 부재와 다름없는 실존에 분노하고 좌절했다. 술에 취해 충장로 길거리에서, 광주역 대합실에서 잠을 자고, 지나는 사람들은 그를 보고 혀를 찼다. 어찌할 수 없는 상한 마음이 상한 육신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그가 광주를 대표하는 음식산업의 CEO가 되어 돌아왔다. 한때 사업실패로 법정관리의 회생절차를 겪기도 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내일의 세상을 힘차게 열어가고 있다.

김 대표에게 따라다니는 '두메푸드 대표'나 '장애인 복지 사회운동가'라는 수식어는 바늘구멍으로 보는 그의 모습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 임에도 불구하고 방송국 라디오 칼럼니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산악회를 만들어 지리산과 한라산은 물론 일본 후지산까지 오른 준산악인이자 행정자치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애주가에 색소폰 연주자라는 직함도 명함에 쓸 정도는 되고, 작사자에 테너 합창단원도 이력의 일부다. 한두 가지 색으로 칠해지기를 거부하는 팔색조가 김 대표이다.

'나는 뵈는 게 없는 사람'이라거나 '나의 삶은 24시간이 봉사활동'이라고 농칠 줄도 아는 유쾌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광주시각장애인 연합회장과 광주시 장애인종합센터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2015년 자랑스러운 한국장애인상에 이어 2017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보지 않고 경영하고, 보지 않고 산에 오르고, 보지 않고 노래하는'사람, 김 대표를 지난 14일 광주시 북구 양산동 두메푸드시스템 사무실에서 만났다.

-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임에도 '행복하다' 는 말을 자주 한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도 행복을 찾아 헤매다 결국은 좌절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나는 두 가지 삶의 목표가 있는데 현명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둘러보면 감사할 것으로 넘친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도 행복이고, 오늘 당신과 만나 이렇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 볼 수 없음을 손으로, 또는 귀로 대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행복은 다름을 비교하면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도 없이 세상 속으로 굴러 들어가니 행복이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래도, 처음 시각장애인이 됐을 때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시력이 좋지는 않았지만 시각을 상실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실명하기 1년 전인 대학 2학년 때만 해도 걸어서 서울까지 무전여행을 할 만큼 자신감과 자존감이 컸기에 실명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끝이고 나의 인생도 여기서 끝나는 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같으면 주변에서 '시각장애인에게도 이런 삶도 있다'며 조언이라도 해줄 텐데 당시는 그냥 불쌍한 사람이 됐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고, 밤이 되면 술에 취해 충장로나 광주공원, 또는 광주역에서 잠들며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 그런 당신을 일으켜 세운 계기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있을 때 생면부지의 시각장애인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내 삶에 반전을 가져왔다.

당시 시각장애인들은 최선의 직업이 안마나 침술이었고, 대부분은 구걸에 의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대학도 다니고, 부모님으로부터 용돈도 받고 있으니 절망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좌절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세상에 도움이 되고, 내게도 보람된 일을 하고 싶었다.

같은 처지의 시각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일일찻집을 열었는데 50만원이 남더라. 당시 시내버스비가 50원 할 때니 큰 돈이다. 사업에 자신감이 생기더라.

그 뒤 동구 궁동의 카톨릭센터 지하 카톨릭다방을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커피 한 잔 값이 300원이었는데 하루 매출이 1천500만원에 달했다. 수익금으로 장애아이들이 함께 사는, 오늘날의 그룹홈 격인 '꿈동산 어린이 집'을 운영하면서 시각장애인계의 떠오르는 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웃음)."

- '두메 야채잔치'라는 상호로 음식사업에 뛰어든 이래 '두메'라는 브랜드의 위탁급식과 김치 생산 판매, 식자재 유통 등 음식업의 한길을 40년 가까이 걷고 있다. 음식업에 뛰어든 이유가 있는가.

"순진했던 것 같다. 사람의 목숨을 잇게 하는 것이 음식이고, 사람의 목숨을 잇게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업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때는 판매하는 음식의 부정적 이미지가 많았던 시절이어서 '양심적으로만 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지금 같으면 안한다(웃음).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라는 말처럼 음식은 시각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하지만 매일 관련 도서를 읽고, 전문가 찾아가서 그의 이야기를 녹음해서 듣고, 내가 생각해도 참 열심히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충실하고 헌신적인 직원들이 있어서 오늘도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두메푸드시스템(주)은 서울 여의도까지 진출하며 연매출 50억원을 기록하는 등 광주를 넘어서는 전국적 음식업체로 성장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금융위기 등으로 두메외식산업(주)과 두메 김치(주), 두메유통(주)은 폐업하거나 매각되고, 두메푸드시스템(주)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2013년 회생했다.

- 사업을 하면서 가까운 지인의 배신으로 상처를 입은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지금껏 사업을 하면서 대략 50억 원 정도의 돈을 사기를 당한 것 같다. 된장을 팔아준다며 물건만 가져간 뒤 도망간 사람도 있고, 친한 지인의 배신도 겪어 봤다.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의 10명 중 1명만 약속대로 돈을 갚고 나머지는 종적을 감추더라. 그래도 나를 둘러 먹은 사람보다는 나를 도와준 사람이 더 많고, 비록 사기를 많이 당했지만 사기 친 사람보다 내가 더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등산이라고 했다. 산행의 가능성 자체도 의문이지만 산행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하다.

"2007년 빛고을두메산악회를 만들어 매월 한두 차례씩 산행을 해오고 있다. 지금껏 300여개의 산에 올랐으니 국내 유명한 산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것 같다. 물론 동행인의 안내를 받는다. 산행을 하다 보면 새소리, 바람소리, 흐르는 계곡물 소리, 정상의 시원한 기온 등을 느끼며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누린다. 보이지는 않지만 산행에서는 모든 감각이 더 예민해지기 때문에 비장애인 못지않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당신도 가끔은 산행에서 눈을 감고 걸어보길 권한다. 자연과 더 깊숙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 희망이 있다면.

"'어둠의 체험관'을 운영하기 위해 얼마 전에 사회적 협동조합인 '어둠속의 빛'을 설립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간극을 좁히고 장애인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어둠의 체험관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입장이 서로 바뀌어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상대로 사물이나 맛 체험도 안내하고 해설도 하는 곳이다. 사회적 공익사업으로 준비 중인데 이미 부지는 확보해 놓았다."

- 시력이 회복된다면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딸 한솔과 아들 준형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 이런 아이들을 낳아 잘 길러준 아내의 눈을 보면서 감사하다는 말도 하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물었다. "장애인의 애로사항은 물으면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좋은 점은 왜 묻지 않느냐"는 것이 질문의 요지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다. 그가 답했다. "나를 보면 대통령도 먼저 인사를 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을 소재로 한 농담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시력을 잃었음에도 이에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유쾌함은 이런 웃음의 여유에서 비롯된 듯 했다. 그는 "실명하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보다 더 깊은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설마'하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조영석(kanjoys@hanmail.net)/시민기자

조영석은

나이 들어가며 나잇값 하는 일이 참 어렵다. 나잇값은 수 십 년째 인상되지 않고 있는데 나이만 늘어간 탓이다. '나 때'를 좋아하면서도 '꼰대'는 싫어하고, 자신의 잘 난체 함에는 둔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 난체 하는 꼴은 금방 알아차린다.

버려지지 않는 자존심은 면도날처럼 여전히 예리하여 자신을 베고, '몸에서 빠진 기운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성질로 이동 했다. 그럼에도 물려받은 유전자 탓에 선한 척 하지 않아도 선하게 보이는 강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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