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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별 공동체 만들어 소통하고 돕는 문화 만들어가고파"

입력 2021.07.28. 11:11 수정 2021.07.29. 13:50
김승용 기자구독
조영석이 만난 사람(11)
‘이주민의 대부’가 된 바수 무쿨

인도 벵갈 출신의 바수 무쿨(57)은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인도를 떠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요가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유럽·아프리카·남미·호주·중앙아시아 등 그의 발길은 69개 국으로 이어졌다.

한국에는 스물다섯 살 때인 1989년 '아난다 마르가' 명상요가 협회의 초청으로 처음 들어와 서울대학교에서 종교사회학으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한국이 좋아 한국 여인과 결혼을 하고 끝내는 한국인이 되었다. 거주지였던 서울 마포가 본관인 한국 '바수'성의 시조다.

2006년 광주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초입에 문을 연 인도박물관의 실장으로 광주와 인연을 맺은 뒤 광주사람으로 눌러 앉았다. 2007년부터 이주민을 위한 비영리단체 '유니버설 문화원'을 세워 난민과 외국인 유학생, 이주노동자 및 이주여성 등 이주민들의 대부를 자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난해 '제13회 세계인의 날'에 이주민들의 지역사회 정착지원 및 사회통합 유공자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22일, 2층 단독주택을 임대하여 이주민들의 쉼터로 사용하고 있는 광주시 동구 무등로 소재 '유니버설 쉼터'에서 그를 만났다.

-개량 한복이 수행자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불편하지 않은가.

"개량 한복이 헐렁한 타입의 인도 전통의상과 비슷한데다 요가복으로도 사용할 수 있어서 즐겨 입는 편이다. 서양 옷과 달리 편하고 좋다. 반팔과 반바지는 아니지만 여름철에는 시원한 한복도 있다. 괜찮지 않나."

-유니버설 문화원에서 하는 일은.

"광주에는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계층이 이주 노동자와 이주여성, 그리고 불법체류자와 난민들이다. 이들의 고충을 상담하고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시로부터 '이주민 119센터'로 지정받은 1365사회봉사활동인증센터이기도 하다.

해결책이 당장 필요한 법률상담이나 의료상담이 많다. 이를테면 '불법체류자인데 어디가면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수 있는가', '근로복지 공단에 서류를 내야 하는데 서류 작성법을 모르겠다', '월급과 퇴직금을 못 받았으니 도와 달라'는 요구 등 이주민들이 한국 생활을 하면서 겪는 모든 고충과 애로 사항에 대해 해결책을 찾아 도와주는 일을 한다.

몸이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해 수입이 없는 이주민에게는 식료품도 갖다 주고, 며칠 전에는 어느 후원자가 양파가 풍년이라며 양파를 보내와서 굶주린 난민가정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곳 숙소는 문화원의 부속 시설로, 오갈 데 없는 이주민들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무료 숙식을 하며 머무는 공간이다. 한 달 평균 150여 명 정도 다녀간다. 백오십이라는 숫자는 이주민의 삶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활동했던 일 가운데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다면.

"광주 인근 어느 지역의 공장 주인이 고용하고 있던 외국인 노동자가 도망갈까 의심해서 외국인등록증과 여권을 빼앗아 보관한 일이 있었다. 이 외국인 노동자는 외국인등록증과 여권이 없다보니 간단한 음식을 사러가고 싶어도 무서워서 나가지 못 한 거다. 공장 주인은 그런 행위가 불법인 줄도 모르고 있더라.

또 한 번은 고용주가 '이 새끼야!'라는 욕설을 했다며 이주노동자가 인권단체에 신고를 한 적이 있다. 자초지종을 알아봤더니 '누르지 말라'는 스위치를 이주노동자가 누르는 바람에 회사에 1천만 원 가량의 물질적 손해를 끼쳐서 고용주가 홧김에 한 말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면 아마 나라도 '이 새끼야!'라고 했을 것 같다(웃음). 문화이해가 없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문화원의 슬로건이 '이주민의, 이주민에 의한, 이주민을 위한'이다. '이주민의, 이주민을 위한'에는 이의가 없지만, '이주민에 의한' 이 가능한가.

"지금은 요원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이주민이 이주민을 돕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국인들도 도와주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스스로 도와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광주·전남 베트남공동체나 호남 몽고공동체, 필리핀공동체, 네팔이나 인도, 우즈베키스탄 유학생회 등 국가별 공동체를 결성해서 상호 소통하고 돕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 이집트나 터키, 아프리카 공동체도 만들 생각이다."

-문화원과 쉼터의 운영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솔직히 무척 어렵다. 예전에는 여러 군데 강의도 나가고 해서 그런대로 운영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코로나19로 행사나 강의 초청이 싹 끊겼다. 지금 살고 있는 쉼터도 임대차 계약이 2~3년 뒤면 끝나는데 걱정이다. 그래도 이주민들의 의료와 건강을 위해 열정적으로 도와주시는 의사선생님들도 계시고, 자원봉사자나 후원자들이 계셔서 힘을 내고 있다."

-요가 수행자와 이주민 활동가로 사는 길은 같은 레일인가.

"요가는 유니버설한 나눔의 문화다. 특히 인간은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과 생물을 지켜주고 사랑하는 웰빙의 존재가 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은 요가 수행자나 이주민 활동가나 다르지 않다.

서울대 유학생 시절에 유학생학생회를 만들어 회장을 지내면서 문화적, 피부색깔적 차별을 없애기 위한 활동을 했던 것도 요가 수행자였기 때문에 더 절실했지 않았나 싶다."

-많은 나라들 가운데 특별히 한국에 정착하여 한국인으로 귀화까지 하게 된 계기는.

"18세부터 세계 69개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7개 국어를 하게 됐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한국어와 여러 국가의 언어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언어로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한국인의 따뜻한 정이 나의 벵갈민족의 정서와 너무 유사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한국인의 정신은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요가 수행법과 맥을 같이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여자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아 살다 귀화까지 결심하게 됐다."

-한국인이 되었지만 피부색이나 생김새 때문에 차별을 받은 적은 없는가.

"아이고, 말도 마라. 내 나이가 쉰일곱 살인데 젊은이들이 반말하고, 욕하고 그런다.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인들은 나의 피부색을 보고 한국인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이 오랫동안 중국과 몽고, 또 일본의 침략을 받다보니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고 한국은 유엔의 주요 국가가 될 만큼 성장했다. 한국인의 강점인 '우리'와 '정'의 개념이 이제는 문화다양성의 수용으로 확장돼야 한다. 이제는 세계화의 '정'이자, 세계화의 '우리'로 가야 할 시대다."

-희망이 있다면.

"점차 이주민들의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주민 전용 요양병원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그들이 늙어 병들고 아프면 마땅히 갈 데가 없다. 이주민들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문화원과 쉼터가 한 공간에 있는 이주민 전용 요양병원을 운영하고 싶다."

그의 1인칭 대명사는 '나'가 아닌 '우리'였다. '우리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우리 딸들'이라거나 '우리 이주민들'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한국인'이다. 하긴 태어난 인도에서 18년을 살았고, 한국에서 32년을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잃어가고, 사라져가는 '우리'를 그에게서 보았다. 조영석 시민기자 kanjoys@hanmail.net

조영석은

영원하지 않는 모든 일상이 기적임을 믿는다. 뙤약볕 아래 붉게 핀 참나리의 오늘 하루도 기적이고, 꽃잎에 맴도는 나비의 날갯짓도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기적이다. 아등바등 삶의 무게가 버거운 날에는 땅에 떨어진 나비의 찢어진 날개를 본다. 내일도 기적의 시간으로 채워질 것을 믿으며 오늘의 기적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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