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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공간

입력 2021.08.05. 20:03 수정 2021.08.05. 20:03
김혜진 기자구독
공간탐구자와 걷는 도시건축 산책
<26>봉선동 단독주택단지

감리 중인 공사현장에 들러 현장 소장과 두 시간이 넘도록 도면과 현장 여건의 차이에 대해 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사무실로 돌아가던 차를 갑작스레 세우고 한낮의 더위 속에 조금 걷기로 했다.

무거운 도면과 각종 서류는 조수석에 던져두고 작은 수첩과 샤프펜슬 만을 들고 차에서 내려, 도로 한 면에 주차된 차들이 줄지어 있는 작은 골목길로 향했다. 평소에도 계획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거나, 계획 중인 설계안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출퇴근길에 차로만 지나던 좁은 길들을 종종 일부러 걷는다.

익숙한 것들을 여행객의 시선으로 응시하며 낯선 것들로 변화시켜 마주하려 노력한다. 늘 존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러 하나씩 꽃이 되어 보일 때가 있다.

봉선동 주택가는 비슷한 재료로 지어진 붉은 벽돌의 2층 주택이 주를 이룬다.

뙤약볕에 땀 흘리며 걸어다닐 때면 학창시절 한여름에 땀 흘리며 함께 공부하던 친구 녀석이 생각난다. 우리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건축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뭉쳐 방학이면 이 골목 저 골목을 내 집 앞 마냥 거닐며 조사하고 다녔다. 비록 담장 너머의 비밀스런 주거행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골목길과 벽돌담장이 만들어내는 일상에서 우리의 모습과 삶에 대한 행태를 주시하고 싶었다. 학생의 용돈으로는 상점들을 마냥 드나들며 땀을 식히기 버거워 그저 걷고 또 걸어가며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느라 사방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가끔 골목 모퉁이와 담장 너머 감나무가 만들어내는 작은 그늘 밑에서 만나게 되는 시원한 바람 아래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면서 나눴던 건축 이야기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아닐까.

구름 한 점 없어 내 작은 그림자조차 가려주지 못하는 무더위 속에 봉선동 주택가 골목길을 헤매다 보니 불쑥 찾아온 옛 생각이 반갑다. 조금 더 추억하려 어딘가에 잠깐 들러 땀을 식히고 싶었다.

기존 붉은 벽돌벽에 변화를 가미한 카페

'그래, 여기다. 얼마 전까지 주택이었던 이곳에서 잠시 쉬어야겠다.'

봉선동 주택가는 1980년대 초반부터 주택공급용지로 개발이 시작돼 후반이 돼서야 현재와 같은 주택단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행정구역상 봉선1동인 이곳 주택단지는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개발돼 크게 두 군데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제석초등학교 주변 단지와 봉선초·중교를 사이에 두는 단지다. 두 주택단지는 30여년 전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많은 시간이 흐른 현재의 모습은 그 변화의 폭이 조금 다르다. 이날은 제석초등학교와 겨자씨교회 사이의 주택가를 배회하듯 관광객이 돼 본다.

이곳 주택가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모두 비슷한 재료로 지어진 붉은 벽돌의 2층 주택이 주를 이루던 곳이었는데 어느덧 작지만 다양한 변화를 겪고 있다. 봉선동의 상업자본이 '쌍용사거리'에서 '삼익사거리'를 지나는 과정에서 이제는 이곳 주택가까지 흘러오는 까닭인 듯하다. 그 흐름이 30여년 된 주택가의 리모델링 시기와 맞아떨어져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벽돌을 재활용한 카페의 모습이 주변과 어우러지면서도 새로움을 더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주택가는 젊은 이방인들의 반가운 출현에 그 변화의 속도가 보다 압축돼 어제와 오늘이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어린이공원을 중심으로 한 주택가는 하나둘 옷을 갈아입고 있지만, 그 옷이 모두 새 옷만은 아니다. 물려 입은 옷, 기워 입은 옷, 새로 산 옷 등 변화에 대응하는 태도는 다양하다. 봉선동 주택가의 변화는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늘 걷던 길에서 한 블록만 벗어나면 새롭게 여행객의 시선을 하게 된다. 변화의 폭이 좁다는 것은 서로를 배려하는 변화를 선택해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엮여있다는 것이다.

스위스 건축가 미로슬라브 지크(Miroslav Sik)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옛것' 혹은 '오래된 새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가로 공간이 됐음을 의미한다. 오래된 주택을 위한 공간 구축적 형태에서 새로운 주거 재현적 공간으로 벗어나며 그 형태와 재료가 갖는 시간성에 기대어 나타난 의도치 않은 표정이 오히려 매력적인 곳이 됐다. 최근 상업공간의 디자인 유행 요소로 생각하는 '보잘 것 없던 산업적 요소의 표현방식 변화'를 이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80년대 붉은 벽돌 재료 속에 잠복해 있던 비밀스런(그렇지만 모두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주거 공간은 형태적 관례를 벗어나 마치 새로운 재료로 둘러싸인 상업공간으로 잠재력을 뽐낸다. 건축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계도적 형태를 벗어나 거주자의 요구행태가 만들어낸 다양한 불법적 시도들 또한 오히려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즐비한 벽돌주택의 담장 곁에 있던 계단, 화장실, 대문 3종 세트는 어느덧 실내로 들어오거나 아예 사라져버렸다. 한 세대의 변화를 겪은 후 찾아오던 권태로움만을 드러내는 담장들도 조금씩 허물어지며 오히려 그 가치의 주름살이 펴지고 있는 듯하다. 특이하게도 최근의 봉선동에서 자주 보이는 외장재료인 라임스톤은 차분하고 세련된 재료로 기존의 붉은 벽돌벽과 어울려 봉선동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고 있다.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 기억요소가 덧칠이 아닌 공존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이질성에서 나타나는 경계심을 지울 수 있다.

붉은 벽돌 주택 옆 새로운 라임스톤을 사용해 리모델링한 카페. 라임스톤은 차분하고 세련된 재료로 기존의 붉은 벽돌벽과 어울려 봉선동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이곳에 새로 자리하는 상점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주를 이룬다. 광주의 여느 신생 번화가와 다른 점이라면, 아무래도 오래된 주택가의 범주 내에서 허용되는 변화이기에 그 공간의 변화 허용치가 늘 '방'의 크기로 한정적이다. 번화가에 있는 넓고 높은 천정고의 공간에서 식사하고 차를 마시는 모습과 다르게, 이곳의 작고 아늑한 공간에서는 그 허용되는 행위와 소리의 크기에 울타리가 있다. 그래서인지 조용히 홀로 사색하거나 가까운 지인과 담소를 나누기에 적당한 공간으로 보인다. 대형 프랜차이즈 사업장의 공간들은 상업적이어야 하기에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우선하는 공간이 아닌 판매와 저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일회적 소모공간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그 낯선 공간에 따스함이 결여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중개적 거리의 모호성에서 비롯되는 공간의 원근이 오히려 불편해지던 대공간은 이곳처럼 충분히 촉지적인 광경으로 둘러져 편안함을 줄 수는 없다.

건축사라는 직업을 갖고서 새로운 카페에 들어서면 먼저 공간성-분위기가 아닌, 수치적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습관적 태도를 자발적으로 우선 견제하게 된다. 소위 '직업병'이라 명명할 수 있는 행위들을 저만치 멀리 두고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경험으로, 직업이 빚어낸 인지로부터 벗어나 야생의 인지로 회귀하고자 하지만 친구와의 옛 시간을 추억하는 것도 잠깐이고 어느덧 가져온 작은 노트 위에 스케치하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내 모습에 고개를 젓게 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주인공이 파리의 골목길을 배회하다 자정이 되면 자신의 사랑했던 파리를 만날 수 있었듯, 한여름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봉선동 주택가 골목에서 오래된 새로운 카페에 들러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의 추억을 마주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김인호 지밀건축사사무소 대표

김인호 건축사는

전남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는 지밀건축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현재 전남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어가며 학부생들의 건축설계 수업을 담당하고 있다. 땅이 간직한 추상적 비밀을 종이 위 작은 놀이터에서 찬찬히, 그러나 바지런히 풀어내는 작업을 즐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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