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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대공감(世代共感)

입력 2022.09.22. 10:05 수정 2022.09.25. 18:44
김승용 기자구독
정지아 아침시평 소설가

어린 시절, 나는 모든 종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만화는 물론 새농민에서부터 신동아, 헤르만 헤세, 선데이 서울이나 사건과 실화에 이르기까지. 사촌오빠들은 두툼한 신동아 뒤에 선데이 서울과 같은 야한 잡지들을 숨겨 두었다. 분별력이 없는 나이였지만 숨겨 놓았다는 건 좋은 책이 아니라는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그래서 나도 남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짜릿했지만 동시에 죄의식도 느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이 허락하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며 성장했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그때는 책을 달력이나 포장지, 타임지 속지로 싸는 게 유행이었다. 영어가 잔뜩 쓰여있는 타임지가 개중 뽀대가 났다. 몇몇 아이들은 타임지 과월호를 사러 청계천 헌책방으로 우 몰려갔지만 가난한 내 어머니는 그런 허세 따위 용납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럴 만한 돈이 없었다. 교과서를 타임지로 싸는 아이들도 "데미안"이나 "달과 6펜스" 같은 책은 기어코 싸지 않았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내가 수준 높은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나는 교과서를 철 지난 달력으로 쌌다. 물론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싸지 않았다. 싸기는커녕 제목이 보이도록 표지를 바깥쪽으로 향하게 들고 다녔다. 우리 시대 공전의 베스트셀러 "사랑의 체험수기"는 반드시 달력으로 쌌다. 한수산이나 박범신, 김병총의 책도 물론 달력으로 꽁꽁 숨겼다. 그런 책을 니체보다 만 배는 재미있게 읽었을 뿐만 아니라 울다가 웃다가 내 온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도 절대 털어놓지 않았다. 그 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 맞췄고, 그 기준을 따라 높이 올라가고 싶어했다. 이해되지 않는 책도 많았지만, 그럴 때는 내 수준은 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벽에 머리를 박으며 고민했다. 이해될 때까지 읽기도 했다. 우리 시대에는 그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대학이나 도서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기성작가의 작품이든 학생의 작품이든 합평을 할 때마다 놀란다.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은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저는 재미있는 스타일이 좋은데 이건 너무 어려워요."

처음에는 이상했다. 어려워서 문제라니? 어려운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친구는 이렇게도 말한다.

"저는 이런 결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세상인데 저는 해피 엔딩이 좋아요. 이 소설은 너무 어두워서 싫어요."

이런 평을 듣다가 깨달았다. 요즘 친구들은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는 걸. 소설이든 영화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예술영화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졸음을 참아가며 보던 우리 세대를 요즘 세대는 의아해할 것이다. 처음엔 아이들이 이상했고, 곰곰 생각하니 지난 시대의 우리들이 이상했다. 왜 우리는 이해되지도 않는 영화를 기어이 봐야만 했을까? 그래놓고는 어디 가서 그 영화 봤노라고 알은 척을 해야 했을까?

자기 취향에 맞으면 열광하고, 맞지 않으면 외면하는 요즘 세대가 옳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부럽다. 스무 살 나이에 자기 취향을 알 수 있다는 것도 부럽고, 취향대로 옷을 입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고상하고 심오한 어떤 기준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것도 부럽다.

나는 아직도 내 취향을 정확히 모른다(어쩌면 솔직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세대 대부분이 나와 같지 않을까? 요즘 세대가 부러운 만큼 나는 우리 세대가 안타깝고, 취향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온 내 부모 세대가 서럽다. 그래서 뭐든지 좋다는 늙은 엄마에게 오늘도 한마디 했다.

"엄마! 뭘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 좀 해보라니까!"

우리 엄마가 당신이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지라도 알고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 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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